‘현장에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 하는 연기’.
이제 배우 이준기의 작품을 보게 된다면 이런 생각이 들 것 같다. 인터뷰가 한 사람에 대한 단 몇 시간 분량의 단편적 인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배우 이준기를 두고 유난하고도 맹목적인 확신이 든 이유는 한 시간 동안 나눈 대화의 밀도 때문일거다. 연기에 대한 갈증과 욕심을 이토록 적극적이고도 가감 없이 토로하는 배우는 흔치 않다. 게다가 지금 막 연기의 재미를 깨우친 신인 배우가 아니라 13년 차 배우라면 더더욱. 대화 도중 그는 1년에 한 작품은 ‘하고 싶다’는 말을 곧바로 ‘해야 한다’라고 정정했다. 하고 싶고, 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이준기는 그렇게 나아간다. 올여름 그는 tvN 심리 수사극 <크리미널 마인드> 의 NCI 요원 ‘현준’이 되어 다시 뛰고 구른다. 2005년부터 미국 CBS에서 방영돼 시즌 12까지 큰 사랑을 받은 바로 그 작품이다. 극성스러운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대작의 리메이크작, 창사 이래 최대 제작비를 투입한 tvN의 2017년 하반기 야심작이라는 부담을 뛰어넘는 것 역시 기대와 설렘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평생을 배우이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평생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상상했을 때 고통스럽다기보다 되레 기쁘고 당연한 듯 여겨진다면 그게 바로 진짜 평생 해도 되는 일일 것이다.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 이후 10년 만에 요원으로 살고 있다. 오랜만에 하는 현대물이기도 하고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면 살아 숨 쉬는, 날것 같은 이준기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즐겁게 촬영하고 있다. 범죄 심리 수사극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애를 담은 작품이다. ‘현준’이라는 캐릭터는 원작 드라마의 어떤 역할이라기보다 한국 정서에 맞게 창조된 인물에 가깝다. 냉철한 프로파일러들이 모여 있는 수사팀에 스카우트된 요원으로 동정심과 이타심이 강하다. 돌발적이고 다혈질 ‘오지라퍼’에 아픔도 지니고 있다. 이런 성격 때문에 피해자와 수사기관 사이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데, 극 초반에는 팀원들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현준’ 캐릭터만 보면 일종의 성장물처럼 느껴진다. 현준은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각성하면서 보다 냉철해지고, 수사팀에 도움을 줄 만큼 성장한다. 청소년기를 아프게 보냈지만 이후 여러 사건을 겪으며 특별수사팀에 합류해 차츰 발전해가는 인물이다. 현준의 인간적인 면을 통해 시청자들이 극에 동화되었으면 좋겠다. 아픈 청소년기라니··· 이미 많은 작품에서 ‘사연 있는 남자’를 맡지 않았나. 이준기 하면 느껴지는 특유의 슬픈 정서가 있다. 맞다. 작가님들이 항상 좀 나를 그렇게, 항상 부모님을 여의고···.(웃음) 내가 양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를 통해 양극의 감정을 보여주면서 다양한 상황을 그리고 싶어 하신다. 그런 쓰임새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지만 같은 감정선이라도 작품마다 다르게 표현해야 하니까, 항상 어렵다.
매 작품 고생도 한다. 이번 작품 역시 액션 신이 많다. 굳이 고생을 찾아 다닌 건 아닌데 작가님들이 대본을 쓰다 어느 순간 나를 좀 굴리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웃음) 또 내가 굴러야 이제 시청자들도 뭔가 좀 보는 것 같지 않을까? 나 역시 역동적인 표현을 좋아하다 보니 현장에서 다양한 의견을 내는 편이다. 그럼 그걸 또 감독님들이 잘 받아주신다.
이쯤 되니 이준기가 하면 로맨스도 막 스펙터클할 거 같다. 에어컨 바람 쐬며 실장 혹은 회장 아들 역할 하고 싶다. 매년 꿈꾸고 있다.(웃음)
일전에 1년에 한 작품은 하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고 싶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다. 가능하면 지금보다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 1년에 최소 두 작품은 했으면 싶은데 드라마 한 작품 하고 나면 반년이 지나 있다. 그렇다고 매 작품을 1월에 시작해 6월에 끝내는 게 아니니까 시기가 애매하게 걸치면 항상 아쉽다. 배우에겐 이력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한데 시간을 허투루 쓰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작품에 대해서는 욕심이 크다. 매번 다른 캐릭터를 만나고 싶고, 꼭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영화에서 임팩트 있는 캐릭터를 연기해 관객을 놀래키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 관계자들도 만나고 있다. 대부분이 ‘이준기 유명한 거 알지’ 하시는데 그럼 나는 ‘이런 건 못 보셨잖아요’ 하면서 적극적으로 어필한다.
배우 이준기로만 너무 열심히 사는 건 아닌가? 일에만 매달리다 보면 때로 외로워지는 순간도 있을 것 같다. 늘 책임감을 느끼며 살기 때문에 그게 나를 외롭게 한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배우 이준기일 때는 열심히 연기하고, 인간 이준기일 때는 인생을 편하게 누리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은 나와는 맞지 않다. 일하는 시간 외에도 ‘내가 뭘 더 해야 하지?’ 혹은 ‘어떤 걸 잘못 하고 있지?’ 자문하며 냉정하게 자기평가를 하는 편이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으니 받은 만큼 좋은 기운을 돌려줘야 하는 건 당연하다. 때로 대중이 원하는 것을 내가 채우지 못할 경우 날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하다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왜 대중의 변화에 못 맞춰가고 있나 다시 돌아본다. 이 일련의 사고 과정이 이제는 무척 자연스러워졌다.
평생 배우 해야겠다. 종종 ‘너 배우 할래? 대중 배우가 될래?’라는 질문을 받는다. 대중 배우라는 단어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대중을 신경 쓰는 배우임엔 틀림없다. 선배들은 대중의 반응에 연연하고 주변 눈치를 보면 연기하기 힘들어지니까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 충고도 한다. 하지만 대중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안 할 수 없는 것 같다. 이타적 성향의 사람들이 상호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나.
오늘 만난 이준기는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성격의 배우인 것 같다. 맞다. 나는 그런 배우다. 다행스러운 건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작은 상처에도 작아지고, 중심이 쉽게 흔들리곤 하는데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아직까지 큰 스트레스는 없다. 그런데 이 또한 확신할 수는 없는 게 왜 나이가 들면 마음이 약해진다고 하지 않나. 요즘엔 나에게 이런 여린 면이 있었나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전에는 일주일이면 끝냈을 고민을 한 달 동안 부여잡고 있기도 하고.
비관이 심했다면 다음 작품을 선택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거다. 특유의 에너지 덕분에 매번 새롭게 일어나지 않았나? 좀 쉬라고 조언하는 사람들도 있다. 배우 혼자 잘한다고 작품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요소가 모여 시너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너무 조바심을 낸다는 거다. 근데 마냥 고민만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왜 실패하지?’ 하고 혼자 생각하기보다 내겐 현장에서 몸으로 답을 찾는 방식이 맞다. 작품을 하는 중에만 얻을 수 있는 각성이 분명 있다. 가령 ‘내가 왜 이걸 또 하고 있지? 왜 발전이 없지?’ 하는 식의 질문은 현장에서 연기를 하고 있어야 생기는 의문이고, 거기서 부딪혀야만 답을 구할 수 있다. 현장에 있고 싶다. 계속.
현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겠다. 심지어 쪽대본도 좋다고 했다. 이 정도면 일중독 아닌가.(웃음) 외우는 걸 좋아해서.(웃음) 배우의 일만으로 매 순간을 채울 수는 없으니 쉴 때는 연기 외에 앨범 녹음이나 공연 형식의 팬미팅도 하고 있다.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새 감정과 감각을 깨우치고 자극받는다. 배우는 자기만의 소스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나. 그런 점에서 배우 일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에너지를 분산하면 소모될 거라 생각할 법한데, 되레 반대다. 작품할 시간을 미뤄가며 팬행사를 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팬들도 있다. 우리에게 그렇게까지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고 하고.(웃음) 그게 아니다. 배우마다 쉬는 시간에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다를 텐데 이게 내 휴식의 방법일 뿐이다.
일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느낌이다. 되게 심심하지 않나?
심심하다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 같다. 예전엔 이런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정작 지인들에게 좋은 말은 못 듣는다. 여행도 많이 하고 취미도 가지면서 많은 것을 경험해보라고 하는데 집과 촬영 현장, 일과 연관된 장소 외에는 별다른 동선이 없다. 대만에 여러 번 가봤지만 정작 아는 건 별로 없는 것도 그래서다. 호텔과 공연장 외에는 돌아다니지 않는다. 관계자들이 이왕 온 김에 관광도 하고 쇼핑도 즐기라고 권하지만 일 다 끝났는데 다른 사람들이 쓰는 돈으로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하면서 뭐하러 남아 있나 싶다. 그런 건 내게 즐거운 일이 아니라고 정중히 사양한다. 그리고 충분히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팬들과 함께하는 이런 추억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나.
그래서 지금 행복한가? 물론이다. 다른 걸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대신 내 인터뷰가 좀 심심하다. 어떤 기자들은 ‘그래서 배우 이준기는 알겠고, 평소 인간 이준기는 어떤 사람이냐’고 질문한다. 다른 배우들처럼 일상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까 서로 좀 난감하다. 인터뷰를 위해서 뭐라도 해봐야 하나 패러글라이딩이라도 할까 싶고.(웃음) 그래서 인터뷰할 때 ‘그때 다리 부러질 뻔했잖아요’ 하는 식의 이야기라도 들려드려야 할 것 같고 말이다. 잡지를 읽는 독자들도 그런 부분을 재미있어 하니까.
그래도 일상 이야기를 하자면 술을 즐긴다고 들었다. 그래서 팬들이 걱정이 많다. 항상 긴장한 상태로 지내다 보니 가볍게 풀어질 수 있는 시간이 좋다. 사람들과 모여 이야기 나누는 걸 즐기는데 사람들 사는 이야기 들으면서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표현하는 것을 일로 삼다 보니 차분히 바라보고 듣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내 이야기도 많이 하고.
한데 술자리를 그렇게 진지하게 만들어버린다고. 마지막엔 결국 일 이야기를 하니까.(웃음) 심지어 요즘은 술 마시며 많이 운다. 전에는 누가 울면 ‘뭐냐 추하다, 취한 거 아니야?’ 하며 타박했는데 나이가 드는 건지 취한 것도 아닌데 어떤 대화가 툭 마음을 건드리면 눈물이 주르르 떨어진다.
아침에 이불킥 좀 했겠다. 처음 몇 번은 이불킥인데 지금은 다 아니까 ‘배우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해버리고 그냥 운다.(웃음) 그래도 술 먹고 화내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이왕 울 거면 예쁘게 울어야지. 배우처럼.
취중에도 배우처럼이라니, 천상 배우다. 난 천상 배우는 아닌 거 같다. 메소드 연기를 해내는 최고의 배우는 아닐지 모른다. 최대한 극 속으로 들어가서 몰입하고 잘하려고 하는 배우일 뿐이다. 그래서 더 긴장해야 한다. ‘연기 천재’ 배우들처럼은 못하더라도 대중의 사랑을 받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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