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한 달의 여백을 두고 배우 이준기와 서예지를 각각 만났었다. 배우로서 지닌 결은 달랐지만 연기를 대하는 방식에서는 샛길이나 우회로가 없는 이들이었다. 혹사하지 않으면 개운치 않다는 듯 끝까지 밀어붙이는 요령부득의 배우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극명히 달랐는데, 특히 에너지를 쓰는 방식에서 그랬다. 이날의 화보 촬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먼저 배우 이준기는 등장과 동시에 현장의 공기를 뒤바꾼다. 뻗어나가는 힘으로 자신을 둘러싼 이들 모두를 무장해제시킨 뒤 그 에너지로 앞으로 나아간다. 반면 서예지는 같은 질량의 힘을 온전히 자신의 안으로 쏟아 넣고 몰두한 뒤 바깥으로 뿜는다. 이렇듯 같기도, 다르기도 한 두 배우가 5월 12일 시작하는 tvN의 새 토일드라마 <무법 변호사>에서 만난다. 두 배우가 주고받을 힘의 균형점을 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가 될 작품이다.
이준기는 법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변호사 ‘봉상필’을, 서예지는 변호사였지만 파렴치한 판사를 참지 못하고 폭행하면서 로펌 사무장이 된 ‘하재이’를 연기한다. 여기에 각자의 과거사가 뒤엉키며 권력과 악에 대항해가는 성장담이다. ‘거악소탕 법정활극’이라는 수식답게 악을 소탕하고 정의를 세우는 과정에서 속 시원한 액션이 펼쳐진다. 법조계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지만 실상은 음지의 권력 실세인 부장판사 ‘차문숙’ 역으로 이혜영이, 어시장 깡패에서 대기업 회장이 된 ‘안오주’ 역으로 최민수가 가세해 이야기를 현실에 단단히 붙든다. 이 흥미로운 조합을 꾸려낸 이가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을 연출했던 김진민 감독이다. 영화 <변호인> <공조> 드라마 <리멤버: 아들의 전쟁>을 쓴 윤현호 작가가 극본을 맡았다.
이준기
촬영 틈틈이 혼잣말을 하더라. 대사를 외우는 거였나? 맞다. 드라마 <무법 변호사>가 액션도 많지만 무엇보다 대사를 차지게 쳐줘야 한다. 봉상필이라는 인물은 능글맞지만 변호사로서 날카로운 면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묵직하게 누르는 듯한 어투와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사에 대한 압박이 있다. 대사 암기력만큼은 여전히 자부하고(웃음) 외우는 거 좋아하지만, 새로운 리듬의 대사라 입에서 꼬일 때가 있다. 새 감각을 몸에 새겨려고 혼자 중얼 중얼, 미친 사람처럼.
드라마 <무법 변호사>는 어떤 작품인가? 개인의 복수극처럼 시작하지만 결국 정의 사회에 대한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액션이 더해져 통쾌함을 배가시킨다. 정의 구현이라는 주제는 재작년부터 국민이 염원해온 것이기도 하고, 지금은 정의로운 사회의 질서가 하나하나 만들어지고 있지 않나. 그 가운데서 우리 드라마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것 같다.
김진민 감독과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 이후 11년 만의 재회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크다. 감독님과 드라마 이후에도 죽 가까이 지냈다. 배우로서 고민이 있을 때 만나면 상담을 해주시기도 하고. 어느 날 감독님에게 연락을 받았다. <무법 변호사> 이야기를 하시며 “솔직히 말할게. 이 드라마 제안받았을 때 모든 스태프가 봉상필 역할에 이준기가 적합하다고 했지만 나는 너 안 하고 싶다고 했어”라고 하시더라. 왜 그러셨냐고 물으니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우리가 같이 성공했는데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면 서로에게 좋지 않을 것 같다”는 부담 때문이라고 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완성도 높고,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작품이라 감독님도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점은 나 역시 마찬가지고. 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다시 연락을 받았다. “내가 너 10년은 더 먹고살게 해준다는 생각으로 드라마 만들어보겠다. 그 정도로 해야 하지 않겠냐”라고 하시는데 그 말이 너무 좋더라. 김진민 감독님의 책임감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고, 성패를 떠나 감독님과 함께라면 분명 남는 것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출연하겠다고 했다.
다시 만난 감독과의 호흡은 어떤가? 익히 유명하시듯 여전히 강하다.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특유의 연출 스타일이 좋다. 좋다기보다 필요한 연출력이라고 본다. 이 시점에서 감독님을 다시 만나면 내 잘못된 습관이 바로잡히고 매너리즘이 깨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그 시기가 돼서 우리가 다시 만난 게 아닐까 하고. 적당히 마무리하기보다 감독으로서 밀어 붙여 무언가를 뽑아내는 것은 중요하고, 그런 점에서 김진민 감독님에 대한 신뢰가 크다. 그만큼 철저히 준비해오는 분이고 에너지가 대단하다.
이준기도 어디 가서 에너지로 밀리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맞다. 스태프들이 다 미쳤다고 한다.
같이 연기하는 배우 서예지도 이준기의 에너지에 대해 극찬했다. 홍삼 먹는다.(웃음) 홍삼 준다니까···. 근데 단순히 뭘 먹고 안 먹고의 문제는 아니다. 얼마 전 동생과 술을 마시는데 동생이 내게 무슨 재미로 촬영 현장에 가느냐고 묻더라. 이전까지만 해도 그런 유의 질문을 받으면 뭔가 있어 보이는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배우는 말이야’ 하면서. 이제는 내가 더 아이 같아져서 그런건지 “내가 TV에 멋지게 나오니까”라고 답한다. 나 한 사람 멋있게 만들어주려고 스태프들이 힘써주는데 이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늘 하고 싶다던 전문직 역할을 맡았다. 게다가 로맨스도 가미돼 있다. 그래서 더 재미있고 기대된다. 하지만 여전히 순애보적 사랑 이야기나 진한 로맨스에 대한 갈망이 있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하고 싶다. 근데 이런 말하면 십년지기 무술감독님은 “뭔 소리야, 지금 날아다니는데 액션 더 해야지. 너 아까워. 로맨스는 네가 남자로 더 깊어져서 해도 늦지 않아”라고 한다. 서른일곱에 어떻게 더 깊어지느냐고 하면 “너 안 깊어 보여. 어린 왕자 같아” 그러시고. 현장에서 예지도 나더러 참 순수한 것 같다고, 어린 왕자 같다고 한다. “속은 썩었어. 시꺼메” 하면 “아니야 내가 사람 볼 줄 아는데 오빠는 진짜 순수한 거 같아”라고 한다. 그럼 난 “이거 욕이야 칭찬이야?” 하고 묻고.(웃음)
서예지와 함께 이혜영, 최민수라는 대선배들과 함께한다. 이 드라마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 두 분을 한 작품에서 만날 수 있겠나. 최근에 최민수 선배님과 처음으로 붙는 신을 촬영했다. 서로 착착 감기는 느낌이 너무 좋았고, 선배님도 만족하셨다. 첫 신을 찍기 전까지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내 촬영이 없는 날 최민수 선배님 촬영장에 가서 “제가 요즘 선배님 꿈밖에 안 꿉니다”라고 인사도 드렸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가는 대로 내가 받쳐줄 거야” 하셨다. 선배님이 내 연기 폭을 넓히기 위해 힘써주시고 또 내가 그걸 잘 받아먹고, 다시 토스하는 일련의 핑퐁 같은 과정이 재미있고 새롭다.
지금 배우 이준기를 어렵게 만드는 일이 있다면? 당장은 이 작품의 캐릭터를 어떻게 완성도 있게 만드느냐 하는 건데 큰 어려움은 없다. 개인 이준기의 삶도 만족스럽다. 처음으로 취미도 생겼다. 주짓수에 완전히 미쳐 있어서 체육관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다. 어려움이라면 팬들이 선물을 많이 주셔서 집에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는 것.(웃음) 계속 선물을 풀고 있는데도. 행복한 어려움이다.
서예지
드라마 스틸 컷의 패닉에 빠진 듯한 표정이 강하게 남더라. <무법 변호사>가 감정의 낙차가 큰 드라마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촬영하면서 감정의 폭이 큰 캐릭터라는 점을 느끼고 있다. 액션을 하면서도 감정은 감정대로 많이 실어야 하는 역할이라 감독님이 섬세하게 방향을 잡아주고 있다. 쾌활한 듯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구해줘>의 ‘상미’만큼이나 감정을 많이 실어야 하는 인물이다. 액션 신이 많아 몸을 씀과 동시에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 작품인 <구해줘>가 배우 이력에 큰 방점이 됐다. 몸과 마음 모두 고생한 작품인데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나? 작품이 끝난 지 반년이 지났지만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다. 왜 베테랑 배우는 작품에서 쉽게 빠져나온다는데, 나는 몇 개월 동안 작품이라는 ‘소굴’에 갇혀 사니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건 있는 것 같다. <구해줘>는 6개월 동안 매회 우는 신을 찍어서 좀 더 많이 남아 있다. 이번 드라마가 정반대의 스타일과 톤을 지닌 작품인데도 전작의 분위기가 남아 있어서 그런지 초반에는 분노해도 어딘가 슬픈 분노로 표현되고, 기쁨을 표현해도 기쁨이 완전히 표현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감독님 디렉션에 충실히 따르면서 많이 벗어났다.
드라마 <구해줘>와 영화 <다른 길이 있다>도 그랬고, 배우라는 직업은 누군가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일상에서 드러내지 않고 살 뿐이다. 극에서는 캐릭터가 지닌 상처를 드러내야 하니 연기적인 것이 요구된다. 다만 배우로서 표현하는 과정에서 더 신중하고 섬세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1년 전, <마리끌레르>와 인터뷰하며 “배우는 마냥 즐거워서는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생각은 여전한가? 마냥 즐거워서도 안 되고, 실제로 그렇게 즐겁지도 않다.(웃음) 캐릭터를 맡을 때마다 느끼는 힘겨움이 있는데 나는 그걸 즐기는 배우는 아닌 것 같다. 왜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 중에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지 않나. 적어도 나는 공감할 수 없는 말이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즐길 수 있나? 즐기지 못하면 견디고, 참는 건데 내가 그 주기를 순환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순환이 결국 연기라는 생각이 든다. 종종 인터뷰하면서 “연기가 재미있느냐, 즐거우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에 재미있지 않다고 답하면 배우 생활이 괴로운 거냐, 그럼 왜 연기자가 된 거지? 하겠지만 아마 모든 배우의 마음이 같지 않을까? 어떤 신에서는 재미있고 웃음이 나다가도 다음 신에서는 고통스럽다. 한데 이건 연기자만의 문제라기보다 모든 직업인이 그렇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연기를 하는 건 왜인가? 일반 직업인은 연차를 쌓으면서 직함을 얻지 않나. 견디다 보면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며 성장하는 셈인데 연기자는 직함이나 급 대신 여유가 생기며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것 같다. 조금씩 여유를 얻으며 나를 다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상황을 즐기는 것 같다.
어떻게든 연기에 매달리려는 인상은 여전하다. 영화는 아직도 많이 보고 있나? 최근에 액션영화 <인 더 블러드>를 봤다. 신혼여행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이 복수하는 내용이다. <무법 변호사>를 준비하며 찾아본 영화인데 여주인공이 몸도 좋고 액션을 아주 잘한다. 알고 보니 격투기 선수이기도 하더라. 넘사벽임을 깨닫고(웃음) 액션을 배운다기보다 액션을 하면서 어떻게 감정을 컨트롤 하는지에 집중해 봤다. 배우들의 액션 합도 참고했다. <무법 변호사>에서는 이준기 선배님이 연기하는 봉상필의 액션 신이 많은데 내가 상대 배우로서 어떻게 그의 감정을 따라주고, 또 어떻게 하면 나로 인해 상대방의 감정이 더 드러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근데 나보다 김진민 감독님이 더 치열하게 고민해주신다. 셋이 똘똘 뭉쳐서 촬영하고 있다.
캐릭터에 대한 고민도 많을 것 같다. 액션이 가미된 장르물에서 여성 캐릭터가 제 힘을 못 내는 경우가 많지 않나? 여성 캐릭터의 다양성을 넓혀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고 지지한다. 특정 성별이 중심이 되기보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제 역할을 해내는 것이 중요한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는 무술감독님에게 “하재이만 너무 도움을 받는 것 같으니 봉상필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있다면 서로 좋은 시너지가 날 것 같다”고 의견을 말했다. 여성 캐릭터가 끝까지 도움만 받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까 나도 액션 신을 하나 달라고 해서 얼마 전 조직폭력배를 때리는 장면을 촬영했다. 근데 덩치가 워낙 큰 배우가 와서(웃음) 딱 봐도 내가 맞을 것 같더라. 좀 체격 작은 배우를 섭외해달라고 부탁드리기도 하고···.
요즘 배우 서예지를 휘어잡는 생각은 무엇인가? 힘듦, 슬픔 등 가라앉는 마음이 크고, 기쁨이나 웃음은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다. 체력적으로도 지치지만 그래도 현장에서는 감정을 끌어올리려고 노력한다. 아무래도 이준기 선배님이 도움을 많이 주신다.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고, 특유의 에너지로 내가라앉은 마음을 살려주고 힘을 주신다. 대단한 에너지의 소유자다. 액션을 그렇게 촬영했는데도 어떻게 밝지? 많이 배우고 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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