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같은 그림이 있다. 우연히 마주한 피사체가 지금 또는 과거의 나처럼 다가오는 작품. 좋은 작품은 그렇게 관람자 저마다의 의미로 오독되며 수세기 동안 살아 숨 쉰다. 시간을 넉넉히 두고 섬세하게 바라보고 싶은 그림. 정진화 작가의 ‘키스’ 시리즈가 그랬다. 적막한 진공의 공간 속 엉켜 있는 두 사람. 서로에게 얼굴을 파묻은 형태는 흐릿하지만 감싸 안은 손만은 선명하다. 은밀하다면 은밀하고, 야릇하다면 야릇할 수 있는 풍경이 더없이 서정적이고 우아하다.
만리동에 자리한 정진화 작가의 작업실 ‘만리재’. 붉은 벽돌로 마감한 마당의 작은 정원에 배롱나무가 자라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건축가 듀오 SANAA가 디자인한 래빗 체어와 한스 웨그너의 Y 체어가 전통 고가구 옆에 놓여 있다. 창틀에 올려놓은 불상과 촛대 사이로 햇빛이 부드럽게 든다. 차분하면서도 생기가 흐르는 공간이다. 타고난 성향이기도 하지만 그가 공간에 공을 들인 데는 이유가 있다.
올해 서른한 살인 정진화 작가는 대한민국에서 미술을 업으로 삼는 이라면 으레 동참해야 하는 궤도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 있다. 유학하지도 않았고, 레지던시와 공모전조차 지원하지 않는 그는 전속 갤러리도 없다. 만리재는 그에게 작업실이자 갤러리로 이곳에서 컬렉터들과 소통한다. 정갈한 공간에 쌓여 있는 작품들, 흰색 니트에 흰색 앞치마를 두른 공간의 주인이 한 풍경처럼 다가왔다. 그가 음악 볼륨을 줄이고, 따뜻한 차를 건넨다.
탐미와 탐닉, 남성과 여성, 제3의 성, 이성애와 동성애 등 몇 개의 키워드로 읽을 수 있는 정진화 작가의 작품을 단지 춘화라고 규정짓는 것은 게으른 수식이다. “춘화라 하면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섹슈얼리티가 작품의 중심이어야 하지만 제 작업에는 성적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없어요. 다만 에로티시즘을 다루는 것은 제가 키스나 섹스 등 인간의 근본 행위에서 아름다움을 보기 때문이에요. 근원적인 것들은 세계가 변해도 계속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고요.” 꾸미고 과장하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한 그에게 야생은 영감의 원천이자 뮤즈다. “자연과 야생에서는 시간 개념조차 무색하잖아요. 그곳에는 생의 순환만 있을 뿐이죠. 태어나고, 먹고, 자라고, 죽고, 다시 태어나고···. 거스를 수 없는 것을 향한 동경이 있어요.”
자연을 향한 동경이나 생의 순환 등 동양적 관념이 작업의 중심이라면, 경계라는 주제는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야깃거리다. 모호한 선과 번지는 채색 스타일 등 동양화적 표현 역시 경계와 관련돼 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대상을 규정하고 선을 긋잖아요. 터번 시리즈에는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한 대상들이 등장해요. 트랜스젠더를 그리기도 하고요. 손동작이나 미묘한 움직임에서 힌트를 줄 뿐이에요.” 경계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한 작업은 이제 경계가 지닌 이중적 의미까지 확대되고 있다. “경계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경계로 보호받고자 하는 바람, 충돌하는 두 의미를 생각해요. 플라밍고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그래서죠. 플라밍고 무리가 서식하는 남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나트론 호수는 주변 용암지대에서 흘러든 물의 탄산수소나트륨 때문에 생명체가 들어가면 그 즉시 화석이 되는 죽음의 호수죠. 이곳에 유일하게 몸을 담글 수 있는 존재가 플라밍고에요. 탄산수소나트륨에 거부반응이없기 때문에 나트론 호수는 곧 포식자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공호인 셈이죠.”
먹과 죽지라는 재료를 보면 동양화를 작업한다 할 수 있지만 그는 자신을 동양화 작가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동양화적 방법 자체를 고수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의 개념과 매체 방식이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이 방법을 사용하는 거죠.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달라진다면 표현 매체 또한 바뀔 수 있어요. 가령 돌을 깎거나 사진을 찍는 등 여러 방식으로요.” 하지만 그는 동양화적 표현 방법이 자신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덧붙인다. “성격이 급해요. 기다리질 못해서 인터넷 쇼핑을 못해요. 전화해서 비용 지불하고 퀵서비스로 받겠다고 한 적도 있어요.(웃음) 오랜 시간을 묵히며 작업하는 성향이 아니기 때문에 먹과 죽지가 잘 맞아요. 보통 베이스 작업을 한 뒤 이목구비와 머리, 가슴을 그려요. 마른 부분에 먹을 덧대면 붓 자국이 남기 때문에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지 베이스가 마르면 안 돼요. 작업을 하다가 중간에 멈추고 ‘내일 해야지’ 미루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죠. 그렇게 30~40장을 반복하고 실패를 거듭해야 마음에 닿는 작품 한 점을 얻을 수 있어요.”
특별한 종이 때문에 작업이 까다로워지기도 한다. “대나무 종이를 사용하는데 닥종이에 비해 섬유질이 짧아 잘 찢어져요. 미술에 주로 사용하는 종이는 아니지만 한지와 장지의 중간 느낌으로 특유의 번짐이 마음에 들어 고수하죠. 기본 재료에 대한 고집이 있어요. 색을 사용하더라도 돌가루를 개어 채색하고요.” 완성 후에는 작품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복원 전문가에게 배접을 의뢰한다. 그에게 작품 완성은 붓을 놓는 순간이 아니라 컬렉터에게 전해지는 순간까지 일련의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전통의 재료로 동시대의 서정을 담는 그는 뷰티 브랜드나 영화 미술팀의 러브콜을 받기도 한다. 영화 <사도>와 <간신> 속 그림들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사도>는 고증을 기반으로 한 병풍이나 유물을 전통 방식 그대로 작업했어요. 다만 사도(유아인)의 방안 병풍은 제 스타일대로 표현했죠.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그림인데 무리 중 한 마리가 물 밖으로 튀어 올라요. 에너제틱하고 끼를 주체하지 못하는, 물 밖으로 나가고 싶은 사도의 마음을 표현했죠. <간신>은 미술 세트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요소들이 많아서 자유롭게 작업했고요. 민규동 감독님이 영화 안에서 개인전 하는 것처럼 작품을 편히 다 보여주자 하셨고, 그걸 편집하지 않고 잘 담아주셔서 애착이 커요.”
분주한 와중에 지난 4월 그는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전시를 열었다. “실적이 좋았어요. 해외 컬렉터들에게 좋은 피드백을 받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어요. 좋아하는 작품이 있었거든요. 판매할 생각이 없었는데 ‘판매가 될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줬으면 좋겠다’라는 의견이 있어서 얼떨결에 내보낸 작품들이 모두 판매돼버리니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작업 자체가 주는 의미가 크기 때문에 가난하더라도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 있으면 행복해요. 적어도 내가 갖고 싶은 그림은 곁에 두면서 작업하고 싶거든요.” 작업의 스케일도 키워갈 생각이다. “공간을 지배하는 작업을 시도해보고 싶어요. 관계와 감정에 관한 개념을 풀어내는 작업도 하고 싶고요. 영화 같은 작업도 생각하고 있어요. 영화를 완성하겠다는 게 아니라 영화처럼 도입이 있고 클라이맥스가 있고 결말이 있는, 감정의 선이 연결되는 작업을 해보려고요. 갤러리에서 전시를 보고 나왔는데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감상을 일으키는 그런 그림이요.”